천리포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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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객원 칼럼니스트 정원일기] 설립자 민병갈 원장의 생애와 철학 - 임준수
작 성 자 천리포수목원 작성일 2012-07-02 14:23 조회 3,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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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 설립자 민병갈 원장의 생애와 철학



임준수 감사



고 민병갈 천포수목원 원장이 세상을 떠난 지 어언 10년 세월이 흘렀다. 금년 4월 8일로 서거 10주년을 맞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민 원장은 칼 밀러(Carl Ferris Miller) 라는 미국 태생의 서양인으로 젊은 날(24세) 한국에 와서 살다가 장년(58세)에 들어 아예 귀화한 푸른 눈의 한국인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초급장교로 인천에 첫 발을 디딘 그는 57년간을 한국에 살면서 세계적인 명문 수목원을 일구어 놓고 2002년 봄 81세로 타계했다.

1974년에 출범한 천리포수목원은 국내 최초의 사설 수목원이다. 그 전에 서울대학의 관악수목원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수목원을 차린 것은 그가 처음이다. 천리포에 처음으로 나무를 심기 시작한 해가 1970년이므로 정확히 32년을 나무와 함께 살다가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는 초인적인 노력으로 첫 삽질 30년 만에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적인 자연동산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미국 호랑가시학회 회장 바바라 테일러의 말을 빌면 설립자 당대에 국제적 위상을 갖는 수목원을 차린 것은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2010년 자료에 따르면 국내 수목원은 모두 44개소로 집계돼 있다. 국립 1개소, 공립 24개소, 사립 13개소 외에 학교 수목원 6개소가 있고 그 밖에 여러 곳에서 공사 중이거나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저마다 분야별로 국내 최대 또는 국내 최초를 자랑한다. 그러나 전세계의 수목원을 아우르는 국제수목학회(IDS)나 영국왕립 원예협회(RHS)가 인정하는 수목원은 몇 개 안 된다. 그 중에서 세계적인 명문 수목원과 유대관계를 맺고 식물 정보와 학술 정보를 교환한 곳은 천리포수목원 뿐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국제화된 수목원이라는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이 누리는 오늘의 위상은 설립자 민병갈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칠 줄 모르는 학구열, 그리고 탁월한 해외 섭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0년 천리포에 처음으로 나무를 심을 때 만 해도 민 원장은 수목원을 차릴 생각이 없었다. 그 후 2년 동안 계속 식목을 하며 그가 마음속에 그린 청사진은 노후를 즐기는 아담한 󰡐별장 농원󰡑이었다. 그러다가 10만 평 규모로 소유지가 넓어진 1973년에 들어 본격적으로 수목원 조성을 결심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가 몰입한 나무 학습은 상상을 초월한다. 1970년대 초반부터 개인 교사로 나무 공부와 수목원 조성을 도운 원로식물학자 이창복 교수는 생전에 민 원장의 학습노력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쳐 보았지만 민 원장처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

은 처음 보았다. 다섯 권의 식물도감을 거의 외우다시피 탐독하여 책장들이

닳고 달아 넝마처럼 될 정도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질문 전화를 해 와서 한 때

는 내 연구실에 걸려오는 전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60대에 들어서도 그

의 학습 진도나 이해의 속도는 젊은 학생들 못지않았다. 그에게서 가장 놀라

운 것은 까다로운 라틴어 학명을 수천 개 기억하며 우리나라 자생 나무들의

토속 이름까지 줄줄이 외우는 기억력이다."





한국의 자생종부터 시작한 민 원장의 학습 범위는 세계의 나무로 끝없이 뻗어갔다. 원래 나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그는 외국에서 들여온 어린 나무들이 천리포 토양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사하는 사태가 잇따르자 70년대 후반부터는 학습의 중심으로 외국수종으로 돌려 집중적인 독학에 들어갔다. 해외 전문 서적을 다량 입수하여 탐독하는 한편, 해외 식물학회에 가입하여 세계적인 식물학자와 원예 전문가들과 교류의 폭을 넓혀갔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식물관련 해외서적과 외국 연구기관과 교환한 자료들이 그 사실을 말해 준다.

천리포수목원은 설립 배경부터 요즘 많이 등장하는 상업적 수목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 원장이 여러 차례 밝혔듯이 교육용으로 출발했다. 개인적인 취향에서 시작한 농원의 밑그림을 수목원으로 바꿀 때 그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공익 기능이었다. 아무나 입장료를 내면 경내를 볼 수 있는 나무 전시장이 아니라 제한된 식물애호가나 식물학도들이 보고 배우는 학습장으로 쓰이기를 바란 것이다. 1990년 봄 그는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내가 제2 조국으로 삼은 한국을 위해 무언가 큰일을 하고 싶었다” 는 말로 수목원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민 원장이 천리포수목원을 통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국내에서 볼 수 없던 세계의 온갖 나무들을 수집하여 한국풍토에 맞게 키우며 이들을 국내에 보급한 것이다. 특히 목련과 호랑가시나무 수집 규모는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자생목을 세계에 알리고 그 씨앗을 퍼트린 노력도 크다. 일부 토종식물 보호론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지만 그가 들여온 외국 수종은 내보낸 국내 수종의 몇 배에 달한다. 이와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공로는 만년 식물학도로 활발한 학술외교를 펼쳐 한국식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것이다. 이창복 박사의 말을 빌면 세계의 식물지도에 한국이 편입된 데는 민 원장의 공로라는 절대적이다. 김용식 교수(영남대학)는 한국식물학계에 처음으로 재배종cultiva 개념을 도입시킨 선구자라고 평가한다.

민 원장은 나무만 키운 것이 아니라 꿈나무도 키웠다.

그의 배려로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했거나 해외연수를 받은 인재들은 국내외 유수의 식물원이나 수목원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고운식물원 관리이사를 지낸 정문영, 한국수목원협회 부회장 송기훈, 환화수목원 식물과장 김종근, 산림청 직원 배준규 등이 그들이다. 해외에서는 미국 모턴수목원 큐레이터로 있는 김군소와 일본 식물원에서 일하는 임운채가 있다. 이들은 모두 해외연수를 통해 국제 감각을 익힌 전문가들이다. 민원장으로 도움을 받아 학계에 진출한 식물학자도 여러 명 있다. 영남대 김용식, 전북대 김무열, 성신여대 김상태 교수 등이다. 천리포수목원에서 2년간 연구 활동을 한 미국인 배리 잉거(Barry Inger) 는 미국국립수목원 아시아식물과장을 지내는 등 저명한 식물학자로 성장했다.

민 원장이 갖는 수목원 개념은 아주 특별하다. 사람을 위한 쾌적한 자연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위해(危害)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나무들의 보호구역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의 수목원 운영 철학은 “인간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천리포수목원을 만들었다󰡓고 밝힌 해외 학회지 기고에 잘 드러나 있다. 식물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人災) 라고 생각한 그는 나무들이 저희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사는 자활 터전으로 수목원을 운영했다. 이 같은 특별한 발상 때문에 그의 생전에는 천리포수목원의 철문이 굳게 잠겨 외부인 이방이 어려웠다.

천리포수목원을 상업화하지 않겠다는 민 원장의 의지는 한 치의 빗나감도 없었다. 수많은 나무를 키우고 묘목을 가꾼 그였지만 생전에 나무 한 그루도 판 적이 없다. 판 경우가 있다면 수목원 후원회 회원에게 염가로 제공한 정도 일 뿐이다. 외부로 나간 수목원 나무들은 거의 다 학교 등 공공기관이나 연구기관에 기증한 것이다. 1990년 미국 호랑가시학회지 겨울호에 실린 민 원장의 기고를 보면 수목원의 설립 목적과 운영 지침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천리포수목원은 세계의 식물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 말고도 두

가지 중요한 목적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첫째는 대학, 지역 산림연구기관, 식

물애호가들을 포함한 수목원 주변의 학교와 공공기관에 잉여 식물을 기증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희귀한 관상수들이 한국에 전파되는 통로를 마련해 주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둘째는 식물원을 포함한 상급 식물연구기관들로부터

교육생을 받아 이들에게 식물수집에 관한 전문 지식을 갖도록 위탁교육을 하

는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흡하지만 우리에게 교육의 기

능은 식물 수집 이상으로 중요하다󰡓




천리포수목원은 민 원장에게 필연이었고 그 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무를 자식처럼 사랑했던 그는 세계적인 수목원을 꾸밀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무섭게 나무공부에 매달리는 학습열, 수천 개의 식물 학명을 외우는 기억력, 막대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이재 능력 등이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일반 한국인이 따를 수 없는 강점은 영어를 모국으로 사용하는 해외 섭외력이다. 49세 늦깍이로 나무공부에 뛰어 든 그는 해외 식물학자나 학술정보를 교환하고 유럽과 미국의 유명 수목원과 대등한 교류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갔다.

민 원장은 천연 경관지대가 아닌 해변의 민둥산에 아름다운 자연 녹지를 꾸몄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수목이 우거지고 경치 좋은 산림지대를 이용하여 조성한 일반 수목원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수목원 본원이 들어선 1960년대의 천리포 야산은 버려진 땅과 다름없었다. 토질도 척박하고 지하수가 빈약한 데다가 갯바람이 심해 나무가 제대로 자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자연의 악조건을 인공연못과 방풍림으로 극복하며 나무를 키운 곳이 천리포수목원이다.

민 원장은 자연 녹지를 개발하여 수목원을 꾸미는 것은 자연에 대한 가학행위로 생각했다. 인간이 아무리 잘 꾸며도 자연의 조화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완도수목원은 천혜의 자연녹지를 훼손한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지목했다. 국내 자생식물 탐사를 위해 1970년대부터 완도 해안을 자주 찾았던 그는 1991년 봄 이곳에 수목원이 생긴 이래 발길을 뚝 끊었다. 완도는 그의 나무 일생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한 완도호랑가시를 발견한 곳이기도 하다.





민 원장은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아름다운 자연을 가졌으면서도 한국은 자연 보호에서는 매우 후진적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생나무를 잘라 사용하는 1회용 꽃다발이나 화환이 유행하는 풍토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를 캐다 뜰에 심는 정원 애호가도 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 사랑이었다. 부유한 서양인었으면서도 평생 골프채를 잡지 않았던 그는 멀쩡한 자연을 훼손하는 골프장 건설이 잇따르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국내 수목원 사업의 원조(元祖)인 민 원장은 신생 수목원이 늘어나는 것에도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 수목원 사업은 당대를 위한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던 그는 천리포수목원은 300년을 내다보고 시작했음을 밝혔다. 실제로 그는 외국에서 가져온 씨앗에서 얻은 어린 목련 한 그루가 꽃을 피우기까지 26년을 기다린 적이 있다. 서울 연희동 집에서 가정부로 40여년 수발을 들어준 박순덕 할머니는 뉴질랜드에서 들여온 새우나무 (Shrimp plant)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30년 애정을 쏟았다고 설명했다.

민 원장의 나무사랑과 수목원 사업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에 치우친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양인의 우월한 입지를 버리고 국적까지 바꾸며 한국의 자연과 가까이 살고 이 땅에 아름다운 자연동산을 꾸미기 위해 일생을 바친 노력과 열정은 수목인 모두가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만일 그가 한국에 매력을 느껴 자연을 가꾼 돈 많은 외국 기업가였다면 천리포 야산은 평범한 상업용 수목원이나 해안의 별장지대로 끝났을 것이다.



필자소개: 조선일보 편집부장과 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를 역임한 원로 언론인. 민병갈 원장 10주기를 맞아 평전 ‘나무야 미안해’를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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