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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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보원장의 정원일기] 이 가을, 그냥 나무만 바라봅니다...
작 성 자 천리포수목원 작성일 2013-10-10 08:27 조회 3,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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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에 가을이 왔습니다.
가뭄과 비바람을 견뎌낸 나무들이 맑고 깨끗한 가을을 맞고 있답니다.
바다를 퍼 담은 하늘은 더욱 깊어지고, 하늘을 품은 바다는 청자빛깔입니다.
하늘과 바다,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서해안의 보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리포수목원의 가을이 익어갑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가을전령은 향기입니다.
늘푸른잎나무들이 가을햇살에도 지칠줄 모르고 푸르름을 더해가니
가을을 알리는 단풍이 쉽사리 제자리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은목서, 금목서가 가을바람을 타고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면 수목원은
온통 향기나라가 됩니다.
천리포수목원은 향기로 가을을 여는 보석이랍니다.
 
 
 
짧아지는 햇살을 그리워하며 석산이 나비를 불러 가을향연을 즐기고 있네요.
태산목(목련)은 가을바람이 불어도 쉬지않고 매일 새로운 꽃을 피우지요.
연보라색 요염한 자태를 뽑내는 colchicum 이 한껏 사랑을 받고 있답니다.
서해안의 보석들은 이처럼 행복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행복한 수목원' '나무가 주인인 수목원'을 만들고자 하셨던
고 민병갈 원장님의 뜻을 잘 이어가고 있다고 초보수목원장은 혼자 만족해
하기도 했었답니다.
 
 
 
그런데 이 가을, 수목원 곳곳에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봄까지 잎이 나지않아 애타우던 멀구슬나무가 가을이 오기도 전에
잎을 잃고 겨울나무가 되었습니다. 한참 고와야할 때에 裸木이 되다니...
초보수목원장은 멀구슬나무 주위를 서성이며 걱정만 했습니다.
'왠 일이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냐...'
그러고 보니 잎새를 떨군 것은 멀구슬나무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봄 사랑을 독차지 했던 꽃산딸나무도 푸르러야 할 잎들이 시들해졌습니다.
머귀나무, 말채나무, 배롱나무, 너도밤나무도 잎새를 떨군채 말이 없습니다.
40년을 버텨온 머귀나무는 이 가을을 넘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는게 분명했습니다.
그동안 나무들은 행복한게 아니었나 봅니다.
겉보기에는 행복해 보였지만 고통을 받고 있엇던게 분명했습니다.
아니 겉보기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스럽다고 얼마나 고함치며 신호를 보냈을가요?
그런데도 나무의 고통을 듣지 못하고 나무의 표정을 읽지도 못한채
나무들이 행복한 수목원이라고 자랑만 늘어 놓다니...
그것도 고통받는 나무의 대변자라고 자처하는 초보수목원장이 말입니다.
 
 

 나무가 왜 아픈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진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용하기로 소문난 나무의사를 급히 초청했습니다. 특별왕진을 요청한 것입니다.
현미경으로 잎을 관찰하고 손으로 흙을 만져보며 뿌리를 세심히 살펴보는
나무의사의 표정이 심각했습니다. 뭔가 큰 문제가 생긴 듯 했습니다.
차마 무슨 심각한 병이라도 걸린 것이냐고 묻지도 못한채 속만 태웠습니다.
별 일아니라고, 몸살을 앓고 있을 뿐이라는 진단이 나오기만을 바랐습니다.
 
 
 
진찰을 끝낸 나무의사는 초보수목원장을 노려보았습니다. 
나무들이 이지경이 되도록 어찌 방치해 두었느냐는 눈빛이었습니다.
고통받는 나무의 대변자가 되겠다던 산림청장이 맞냐는 눈초리였습니다.
나무들이 고통을 받은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무들이 살아가기엔 너무 힘든 환경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버텨왔지만 이 상태로는 나무들이 살아갈 수 없다는
진단이었습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라니... 
 
 

 40년 전, 천리포수목원은 나무한그루 없는 민둥산 모레언덕이었습니다.
그 버려진 모래땅에 나무를 심고 또 심어 오늘날 14,000여 종류의 식물이
터잡고 살아가는 세계적인 수목원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래땅에 나무를 심고 40년간 비료 한 줌 넣어 준 적 없었습니다. 
해충을 방제한다고 약 한번 쳐 주지 않았습니다.
비료와 화학약제 안 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모래땅엔 영양분이 없었습니다.
모레땅 아래쪽은 찰흙층이어서 나무는 뿌리를 뻗을 수도 없었습니다.
뿌리를 뻗지 못하니 서해바닷바람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나무가 어렸을 때에는 그나마 견뎌냈는데 커가면서 더 이상 버틸수 있는
상황이 못되었습니다.
겉보기에는 건강했지만 나무들은 고통속에 죽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초보수목원장은 나무들이 잘 자라는 줄로 만 알았으니...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땅이었습니다. 땅을 바꾸어 주어야 했습니다.
나무는 한번 자리 잡으면 그 땅에서 몇 백년을 살아가는데 이 상태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깊이 파서 굳은 땅을 걷어 내고 새 흙을 듬뿍 넣어 주었습니다.
잘 부숙된 유기질비료를 보드라운 흙과 섞어 함께 넣어 주었습니다.
병해충도 방제해 주고 긴급처방인 엽면시비도 해 주었습니다.
비료와 화학약제를 안쓰는 것만이 자랑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함을 깨우친 것입니다.
 
 

늦었지만 다행어었습니다. 나무의 고통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무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파악이 되었으니요.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은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과 같다'라고 말로만
떠들던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 없습니다.
겉만보고 속은 보지 못한 어리석음을 이 가을 깨우칩니다.
'뿌리깊은 나무가 바람에 아니 쓰러진다'는 진리도 세삼 되새겨 봅니다.
이 가을, 저 맑은 가을하늘을 쳐다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굳은 땅을 파 내고 새 흙을 넣어 주니 나무들이 생기를 찾는 듯 합니다.
이제 정말로 나무들이 행복한 수목원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40년 간 굳은 땅은 한 나절이면 파 낼 수 있는데,
보드라운 새 흙을 넣어주어 나무들은 춤추며 자라날 것인데...
40년 간 굳어버린 초보수목원의 마음은 무엇으로 퍼내야 하는지요.
몇 년째 시 한 줄 짓지 못하는 메마른 정서는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요.
초보수목원장은 또 언제쯤 나무의 마음, 숲의 노래를 읊을 수 있을런지요...
 
이 가을, 초보수목원장은 그냥 나무만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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