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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무를 찾아서] 나무와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옛 마을 들녘 한 가운데 서서
작 성 자 천리포수목원 작성일 2013-10-01 08:40 조회 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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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찾아서] 나무와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옛 마을 들녘 한 가운데 서서
 

 
 
   [2013. 9. 30]

   가을비 촉촉히 젖은 새벽 길을 걸었습니다. 바람 거셌던지, 길가의 회화나무에서 떨어진 이파리가 길 위에 흐트러졌습니다. 낮의 햇살에 매달리던 늦더위도 이제는 그만 물러가야 할 시간입니다. 여느 해에 비해 조금 일렀던 한가위 명절도 지났으니, 물러가는 더위도 그리 섭섭할 건 없을 겁니다. 사람도 나무도 부는 바람 따라 지난 계절의 수고를 접고 갈무리 채비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명절 뒤에 거제도 푸른 바다에 다녀왔습니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라 해도 바다 속을 뚫고 달리는 가거대교를 건너고 싶었습니다. 색다른 경험을 하리라 잔뜩 기대한 길이었지만, 실제로는 여느 평범한 터널을 지나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다 깊이 들어갔지만, 그곳이 바다라는 걸 느낄 수 있는 표식은 전혀 없으니까요. 일부러 먼 길을 골라, 생각보다 비싼 통행료까지 지불하고 들어선 해저터널이었지만, 별다른 느낌을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역시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의 곡식들을 바라보며 늠연히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13호인 거제도 거제면의 명진리 느티나무입니다. 몇 해 전 거제도 동편의 거제 덕포리 이팝나무를 찾았을 때, 함께 만났던 나무여서 초면은 아닙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나무는 이제나 저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마을 들녘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마침 나무가 거느린 들판의 곡식들은 초록 빛을 내려놓고, 풍요의 가을 빛깔인 누런 빛을 살금살금 띄우기 시작했습니다. 나뭇잎의 초록 빛이 한결 돋보일 수밖에 없는 풍경입니다.

   지금 명진리는 그저 조금 넉넉해 보이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지만, 유서 깊은 마을입니다. 이 마을을 신라시대 때에는 명진현이라 불렀고, 거제도에서는 지금의 장승포 아주동인 아주현, 지금의 남부면인 남수현과 함께 가장 번성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명진현은 매진이현이라고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 명진현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마을의 역사가 무척 오래 된 곳이라는 이야기이지요.
 
 
 

 
 
  마을 사람들은 거제 명진리 느티나무가 신라의 명진현 시절부터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농사의 풍흉을 관장하던 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알 수 없는 오래 전부터 이 느티나무를 마을의 수호목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이야기대로라면 나무는 무려 1천3백 년을 살아온 나무여야 합니다. 그 정도의 수령이면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느티나무 가운데에는 가장 오래 된 느티나무에 속합니다.

   물론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방법이 있을 수 없으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조건 틀렸다고 닦아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풍채만으로 봐서는 그만한 나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나무가 서 있는 그 자리는 오래 전부터 당연히 나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풍경이라는 점에서만큼은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할 1991년 당시 나무를 정밀조사했을 전문가들은 거제 명진리 느티나무의 나이를 6백 년으로 추정했습니다. 외형으로 보아 1천3백 년의 역사를 인정하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6백 년이라는 전문가들의 추정 역시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사람의 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나무의 수명을 언제라도 단언할 건 아닙니다. 6백 년이라는 거제 명진리 느티나무의 수령 역시 현재의 생육 상태를 기준으로 한 또하나의 추측이니까요.

   나무는 키가 14미터 쯤 자랐고, 가슴높이 줄기둘레는 8미터 가까이 됩니다. 무척 큰 나무임은 틀림없습니다. 나무는 줄기가 땅에서 1미터 쯤 올라온 뒤에 가지를 사방으로 고르게 펴졌습니다. 그 폭은 동서로 23미터, 남북으로 20미터 쯤 됩니다. 이 정도면 매우 큰 느티나무에 속하지요. 덩치 큰 나무들이 대개 그렇듯이 거제 명진리 느티나무는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표정이 다릅니다. 마을 쪽에서 나무에 다가서며 바라보면 처음에는 나뭇가지 꼭대기가 뾰족한 우산 모양으로 보이지만, 조금 걸어서 나무의 남쪽 들판에 서서 바라보면 나무는 어느새 어느 옛 마을 모정(茅亭)의 푸근한 지붕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바뀝니다.
 

 
 
    1미터 정도 높이로 낮은 단을 쌓아 나무가 서 있는 자리를 약간 돋운 것이나, 나무 줄기 곁으로 빙 둘러서 평상을 놓은 것도 모두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지요. 오래 전에 놓은 평상에는 처음에 칠했던 하늘 색 페인트가 벗겨지며 조금은 어지러워 보이지만, 나무 뿌리가 숨 쉴 땅의 답압(踏壓)을 막기 위한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칠이 벗겨진 낡은 평상은 오히려 마을 사람들과 나무가 얼마나 친밀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이 될 겁니다.

   마을에는 이 나무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혼사를 치러서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되는 새 색시가 반드시 치러야 했던 통과제의 이야기입니다. 명진리의 새 색시라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마을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이 느티나무를 찾아가서 인사를 올려야 했다는 겁니다. 일종의 고신제(告神祭)인 셈이지요. 물론 지금은 없어진 풍습이지만, 지나간 옛 이야기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마을 사람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튿 날의 일정 탓에 밤을 도와 상경할 수밖에 없는 거제도에서의 하루였지만, 신라시대 때 번성했던 한 농촌 마을 들녘에서 익어가는 곡식과 그를 거느리고 늠름하게 서 있는 명진리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우리 땅의 평화와 풍요를 한껏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무가 좋은 건, 바라볼수록 사람의 마을에 흐르는 시간과 나무를 스쳐 흐르는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풍요와 평화를 느낄 수 있는 때문이겠지요.

   이제 가을입니다. 무리수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1천5백 페이지를 훌쩍 넘길 다음 책의 원고를 퇴고하는 일은 이번 가을 나무들이 제게 내린 갈무리 몫입니다. 나무처럼 말없이 그리고 언제나 풍요롭게 마무리하도록 애쓰겠습니다. 나무와 사람이 함께 아름다운 날들을 꿈꾸며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솔숲에서 드리는 나무 편지'는 www.SOLSUP.com을 운영하고 있는 나무칼럼니스트이자 공익재단법인 천리포수목원의 이사인 고규홍 이사가 매주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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